selfless jean

단풍 부스러기

revvon 2022. 12. 11. 08:38


0.
말라비틀어진 선인장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혼도 화분을 떠난 지 오래일 것 같다


1.
길든 물건이 없는 게 아쉽다
너덜너덜하도록 내 손을 타서 낡은 것
나의 체계로 질서 있게 더럽혀진 것
반복적으로 곱씹고 되새김하는 것
완전히 내 것이 되어 익숙해진 것


2.
남의 무언갈 구리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이 구리다
내가 더 잘하겠다 싶은 걸 아직 안 했다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다

‘하고 싶어 했었다’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
발끝이라도 담가봤었다, 도 아니고 그걸 하기 위한 여럿 시행착오와 좌절이 있었다, 도 아니고 그저 하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- 어쩌라고?

행위만이 남는다
생각과 소망과 공상과 계획이 현실로 조금이라도 꺼내진 적이 없다면 그저 그뿐이다
그게 아예 무의미하다 할 순 없지만
아쉬워할 단계의 첫발도 안 떼어놓고 허상에 머물러있는 것에 미련씩이나 가질 것도 없단 소리다


3.
주머니 뻐큐를 주머니 안쪽에서 보고 싶지가 않다
리즈너블한 이유 없이 누굴 열렬히 미워하는 건 추한 것 같다
그 미움의 합당함 자체가 주관적인 개개인의 것이어서
이유의 같잖음과 그럴만함은 주체 바깥에서 쉬이 따질 수 없는 것임에도 .. 여튼 분노에 에너지 표출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 곧장 피곤해진다


4.
무엇에 자부심을 느껴야 될까?
처음부터 내가 일구어낸 자랑거리가 있으면 좋겠다


5.
생을 아주아주 오래 살아서
새로이 태어나는 기념일들의 누적을 거듭하면 일 년 365일 중 아무것도 아닌 날이 없게 될 수도 있겠지

생일이 다가올 때의 기분은 도통 무뎌지질 않는다
올해도 보통날처럼 떠나보내야지


6.
나의 고유함을 뒤적이는 게 이젠 재미대가리가 없다
뭐가 그리 흥미롭고 뭘 그렇게 펼쳐놓고 싶었던 걸까?
누군가 아까운 나를 궁금해해주길 안달 내기도 했었는데
실상 모든 타인도 나만큼이나 아깝고 재미있는 개인들이다
나 이상으로 나를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당연함
혼자 아는 걸로도 이젠 족하단 느낌이다
물론 계속 벌거벗고 다니긴 할 테지만


7.
의외로 좋아함에 진정한 그냥이란 건 없는데
좋아하는 건 제법 자주 그냥으로 뭉뚱그려진다
그냥과 왠지는 만능이고 그래서 뭘 좋다고 말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다
좋다의 무게를 정확히 계량하는 건 더 어려워진다
천차만별의 단위를 아주 공들여 골라야 한다


8.
묵힌 애정이 갈 곳이 없다
방향 없는 새 어딘가 고여 차곡차곡 누적되는 것도 아니고
누굴 좋아한들 바라지 않고서 얼마나 줄 수 있겠냐마는
그래도 누굴 엄청나게 좋아하고 싶다
가닿을 수 있는 사랑을 전하고 싶다